세이프게임
“1622화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오래 기다렸습니다, 신주!
이 말을 들은 순간, 엽현의 동공이 확대되면서 머릿속에 파편으로 존재하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점점, 그의 눈빛이 흐릿해지더니, 마침내 눈의 흰자만 남고 검은 부위는 모두 사라졌다.
장내 모든 무인들의 시선은 여전히 엽현에게로 집중된 상태였다.
엽현은 정말로 우주신정의 창시자일까?
사실 이들 중 그 누구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주신정 창시자가 존재하던 시절은 지금으로부터 너무나 오래전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가 환생을 했다 하더라도 그게 엽현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우주의 질서를 수호하고자 했던 창시자가 질서를 어지럽힌 액체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한편, 도 역시 아무 표정 없이 엽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어렴풋이 뭔가를 알고 있긴 했다.
왜냐하면 이는 그녀가 지금까지 추적해 오던 일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반대쪽의 목소도 역시 평온한 표정으로 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엽현이 우주신정의 창시자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엽현이 창시자가 아니었더라면 왜 저 소녀가 그의 편에 섰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엽현이 정말로 창시자인지 밝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엽현이 만약 우주신정의 초대 신주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다음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엽현이 갑자기 오른손을 격렬히 떨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수많은 환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 평화로운 섬.
한 남자가 나무에 비스듬히 기댄 채, 책장을 넘기고 있다.
남자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도 보인다.
소녀는 작은 비수를 휘두르며 무공을 연마 중이었는데, 그녀의 비수가 번뜩일 때면 장내에는 어김없이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소녀는 열심히 수련을 하면서도 틈틈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남자를 훔쳐보곤 했다.
남자 역시 간혹가다 소녀를 쳐다보았는데, 눈이 마주칠 때면 미소를 보이며 잘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용기를 얻은 소녀는 더욱 열정적으로 수련에 임했다.
이때, 남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에 있는 하얀 치마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남자의 넓적다리를 베고 누운 채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는 남자가 보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때, 하얀 치마의 소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둘째가 좀 이상해.”
“어디가?”
남자가 웃으며 묻자, 백의 소녀가 책을 덮고는 남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뭔가… 요즘 들어 더 건방져졌달까?” 남자가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온화한 미소로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일(道一)! 또 내 험담하고 있었지!” 음성과 함께 검은 치마를 입은 소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는 대략 십오륙 세의 용모로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 놓은 모습이 다소 단정치 못한 모양이었다.
다만 소녀의 얼굴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특히나 그녀의 두 눈에는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과 도도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흑의 소녀의 뒤로는 붉은 치마를 입은 또 다른 소녀가 서 있었다. 홍의 소녀는 나무 밑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미소와 함께 달려가려고 했지만, 이내 흑의 소녀를 의식한 듯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남자의 백의 소녀 곁으로 다가온 흑의 소녀는 비수를 들고 홀로 수련 중이던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넌 살수의 자질이 없어!”
이 말에 비수를 든 소녀가 동작을 멈추고서 흑의 소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흑의 소녀는 이미 시선을 거둔 상태. 이때, 비수를 든 소녀가 차가운 표정과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 순간, 흑의 소녀가 보지도 않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켁…….”
흑의 소녀의 손은 어느새 막 암습을 시도하려던 비수 소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흑의 소녀는 발이 허공에 떠서 바둥거리는 비수 소녀를 향해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넌… 만 년이 지나도 나한텐 안 돼…. 어디서 분수도 모르고….” 말을 마친 흑의 소녀는 비수 소녀를 그대로 내팽개쳐버리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생각을 바꾼 듯 비수 소녀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겨우 자유의 몸으로 풀려 난 비수 소녀는 실의의 빠진 표정으로 손안의 비수를 바라보았다.
홍의 소녀는 말없이 그런 비수 소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흑의 소녀의 뒤를 쫓았다.
한편, 나무 아래로 돌아간 흑의 소녀는 얼굴을 찡그린 채 백의 소녀 앞에 섰다.

“도일, 불만 있으면 나한테 직접 와서 말을 하던가, 아니면 한 판 붙던가! 왜 나 없는 데서 주인한테 내 욕을 하는 거야?” 도일이라 불린 소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흑의 소녀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에 기분이 상한 흑의 소녀가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 순간,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기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흑의 소녀는 군말 없이 남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는 뒤에 서 있던 혹의 소녀에게로 웃으며 말했다.
“액난, 너도 앉아라.”
이에 홍의 소녀가 쭈뼛거리며 남자 곁에 가서 앉았다.
남자는 다시 시선을 정면의 흑의 소녀에게로 가져갔다.
“아명(阿命), 너는 왜 이리 폭력적인 게냐?” “…그럼 어떻게? 난 원래 이런데?” 소녀가 이마를 찡그리며 대답하자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먼저 들어가 있거라.”
아명이라 불린 소녀는 잠시 말없이 남자를 응시하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몇 발 걸어가던 아명이 걸음을 멈췄다.
“주인은 정말 내가 싫어?”
“내가 널 싫어해서 이러는 것 같으냐?” “…아마도.”
말을 마친 아명은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명이 사라지자 남자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오냐오냐해선 안 돼.” 도일의 말에 남자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쩌면 내 기대치가 높은 것인지도 모르지.” 남자는 우려 섞인 시선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자질 하나만 놓고 보면 너희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아이야. 무엇을 가르치든 가장 빨리 습득해내곤 하지. 그런데… 과격하고 외골수인 성격이 항상 마음에 걸리는구나….” “…….”
“후후, 그렇지만 난 너처럼 아명이도 믿는다. 왜냐하면 너희는 내 가족이니까!” 도일은 밝은 표정의 남자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남자가 비수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이었다.
“소막(小暮)아,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넌, 너 자신만 믿으면 돼.” 소막이라 불린 소녀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명은 너무나 대단한걸…….” “하하,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정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이지!”
남자의 말에 비수를 쥔 소막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나… 열심히 할 거야!”
남자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시각, 구름 위에 도착한 아명은 품 안에서 작은 나무 인형을 꺼내 들었다. 자신과 똑 닮은 인형을 응시하던 그녀는 점점 표정이 차갑게 변하더니, 급기야는 손에 힘을 주어 나무 인형을 박살 내고 말았다.
그렇게 가루가 된 나무 인형은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우주신정의 대전 앞.
엽현이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다소 흐리멍덩한 상태였다.
하지만 몽롱한 상황 속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전의 장면들은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이때, 엽현이 눈앞의 십이 신상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침묵의 순간이 흐른 후, 갑자기 지면이 떨리더니, 모두의 시선 속에 열두 개의 조각상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쩌억-!
마침내 조각상이 완전히 벗겨지고 그 안에서 열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눈을 뜬 남자들은 엽현을 발견한 순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신주를 뵈옵니다!”
신주!?
이 모습을 본 순간, 우주신정 강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의와 목소도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마의는 손까지 떨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한편, 목소도는 차분하게 다음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우주신정은 법칙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눈 앞의 창시자의 편에 설 것인가!
한편, 엽현을 응시하고 있던 신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주신정 십이수호신(十二守護神)이 깨어났다!
이로써 엽현의 신분에 의문을 갖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했다.
엽현은 정말로 우주신정의 창시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의혹이 발생한다.
창시자인 그는 왜 액체가 된 것일까?
또한, 그는 왜 원래의 신분 대신 젊은 검수로 살아가고 있던 것일까?
신주의 머릿속에서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우주신정의 나머지 무인들 또한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엽현이 우주신정의 초대 신주라는 것은 확인했다.
그렇다면 적이었던 그를 어찌 대해야 하는 것일까?
계속 싸워야 하나? 아니면 무릎을 꿇어야 할까?
하지만 이 대목에서 가장 머리가 복잡한 이는 다름 아닌 엽현이었다.
이것으로 자기 몸 안에 있는 신비인의 신분이 우주신정의 창시자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냥 위기를 좀 모면하고자 뱉은 말이었는데 정말 현실이 될 줄이야…….’ 엽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말하는 대로 이뤄지다니… 혹시 신기가 있는 걸까?
이때, 신주가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우주법칙이시여…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해명?”
이 순간, 어디선가 비웃는 듯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무슨 해명이 필요하단 말이냐?” 이 목소리에 모두가 일제히 한 곳을 돌아보았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여인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알록달록한 치마를 입은 여인은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뒤로 넘긴 상태였다. 그녀의 곁에는 모두에게 익숙한 노인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목이 잘려 죽었던 불사노인이었다!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우주신정 무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엽현 곁에 있던 살수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녀의 눈빛에서는 두려움의 기색이 가득했다.
도의 표정 역시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본능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우주법칙!
다만, 이는 우주법칙의 본체가 현신한 것은 아니었다.
신주를 바라보며 선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해명을 원하느냐?”
신주가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저 남자는… 우주신정의 창시자입니다.” “후후, 그래서?”
“왜… 죽이라 하셨습니까?”
“음? 그걸 너희가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느냐?” “그저 진상을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에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가 충성해야 할 대상이 우리 우주법칙이더냐 아니면 창시자더냐?” “…진실을 알려 주십시오.”
여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알려주지. 진실은 바로…….” 이 순간, 여인의 소매가 펄럭였다.
쉭-!
여인의 손에서 빛이 번뜩이는 듯싶더니, 이내 신주의 몸이 수천 조각으로 찢어져 흩어졌다.
초살(秒殺)!
순간, 우주신정 무인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신주를 죽이다니!
그것도 멸범경의 강자를 단 일 초 만에!
이게 정녕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이때, 여인이 나머지 무인들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웃는 얼굴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리에게 충성하겠느냐, 아니면 저자의 편에 서겠느냐?” 순간, 침묵과 함께 무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주신정이 충성해야 할 것은 우주법칙인가 아니면 창시자인가?
일부 무인들은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곧장 여인의 뒤편으로 가서 섰다.
물론 우주신정을 만든 건 초대 신주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에게 명령을 해 왔던 것은 우주법칙이었다.
심지어 창시자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기에 거리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우주신정의 모든 무인들이 여인 뒤편으로 가서 섰다.
단 한 사람, 언소소만 제외하고.
언소소가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진상을 원합니다.” “후후, 물론이지.”
여자가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언소소를 가리켰다.
언소소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살수 소녀가 그녀 앞에 나타나 비수를 휘둘렀다.
쉭-!
그녀 앞의 공간이 날카롭게 갈라짐과 동시에 언소소를 향해 날아오던 어떤 신비한 힘이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소녀가 곧장 엽현을 향해 소리쳤다.
“도망쳐! 어서!”
도망쳐!
이 말을 듣자 엽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도망?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여인이 엽현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오늘 너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이 순간, 도가 갑자기 자리에서 사라졌다.
바로 이때, 검은 장포를 입은 무인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쾅-!
도가 검을 쥔 채로 원래 있던 자리까지 주르륵 밀려났다.
이때, 장내에 서른여섯 명의 흑의인이 부지불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의 경지는 모두 멸범 절정이었다.
여인이 웃는 얼굴로 엽현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출수!”
음성이 떨어진 순간, 엽현 앞에 있던 십이수호자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서 신형을 날렸다.
놀랍게도 그들의 목표는 바로 엽현이었다!
문제는 이 수호자들 또한 멸범경 절정의 강자라는 것이었다!
과연, 현재 엽현의 실력으로 이들을 막는 게 가능할까?”